[경기북부일보=박다솜 기자] 한반도선진화연구원의 이화영 이사가 번역한 ‘장춘진인 서유기’가 출간됐다. ‘장춘진인 서유기’는 13세기 몽골제국의 칭기즈칸과 중국 전진도(全眞道) 용문파(龍門派) 개조인 구처기(丘處機) 조사의 역사적인 만남을 소개한 책이다. 이 두 거인의 리더십과 처세술은 오늘날 우리가 교훈으로 삼고 본받아야 할 부분이 많다. 12~13세기 인류 역사에서 칭기즈칸이 차지하는 부분은 매우 크다. 그중 칭기즈칸과 구처기가 관련된 일화는 여러 나라에서 영화, 소설, 드라마 등으로 제작돼 ‘지살령(止殺領)’ 혹은 ‘일언지살(一言止殺)’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살인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 혹은 ‘말 한마디로 살육을 멈추라’고 한 사람이 바로 진인(眞人) 구장춘(丘長春)이다. 장춘은 그의 도호이고 이름은 구처기다. 이 책은 중국 도가(道家) 전진도 용문파의 시조인 구처기 조사가 칭기즈칸이 있는 서역으로 3만5000리 길을 이동하며 도를 전수하고 무차별적인 살육을 막은 내용을 서술한 것이다. 구처기는 당시 76세의 고령으로 21명의 제자들과 함께 풍찬노숙을 하면서 전쟁의 참혹상을 직접 경험했다. 칭기즈칸은 처음부터 고령의 도사를 순순히 만나주지 않았다. 칭기즈칸은 구처기를 테스트하기 위해 미리 ‘5관(다섯 단계의 관문)’을 만들어놓고 그를 시험했다. 이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시작조차 하기도 힘든 난관이었지만, 구처기에게는 그저 조금 번거로운 일 정도였다. 5관을 통과하자 칭기즈칸은 구처기의 혜안과 경지를 인정하고 일 년간 곁에 두며 조언을 구하게 된다. 본서의 저자 왕역평(王力平)은 구처기가 개창한 용문파의 제18대 계승자다. 그는 당시 칭기즈칸과 구처기 조사 사이에 있었던 핵심적인 사실들이 역사의 기록에 빠져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8백년 동안 도문 내부에서 계승자에게만 전해진 역사의 비밀을 이제는 밝힐 시기가 도래했기에 본서를 집필했다고 말한다. 물론 구처기 조사의 여정과 칭기즈칸과의 만남에 대한 역사는 이미 여러 곳에 기록돼 있다. 구처기의 서행에 동행한 제자 이지상이 쓴 동명의 ‘장춘진인서유기’와 당시 칭기즈칸의 신하 야율초재가 저술한 ‘현풍경회록’, 그리고 몽골국의 역사책인 ‘몽골비사’ 등이다. 그러나 이런 기존 서적들은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가장 중요한 담화와 사건을 기록으로 남기지는 못했다. 용문파는 이러한 내용들을 제18대 계승자인 왕역평에 이르기까지 중단 없이 전승했으며, 현대에 이르러 마침내 본서에 담기게 됐다. 저자는 사서의 기록 속 ‘단지 생명을 지키는 길은 있지만 영원히 살 수 있는 약은 없다’는 구처기의 말 한마디에 어떻게 칭기즈칸은 단번에 깨달았을까, 칭기즈칸을 추살하라는 전진교의 명령은 사실인가, 산동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는 직선거리로 몇천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데 구처기가 우회한 이유는 무엇일까, 구처기 조사는 왜 금나라와 송나라의 초청을 거절하고 칭기즈칸에게 갔는가, 구처기 조사의 서행은 실제 21명인데 왜 사서에는 18명으로 기록됐나, 원나라 수도인 연경와 구처기 조사는 어떤 관계인가, 칭기즈칸의 묘지는 어디에 있는가 등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던 질문들을 던진다. 또한 저자는 칭기즈칸의 리더십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칭기즈칸은 신분이나 직위, 성을 배제하고 오직 능력만으로 인재를 선발했고, 정복지에서도 이교도에게 핍박을 가하거나 특정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고 강조한다. 특히 구처기는 인재를 알아보는 칭기즈칸의 능력에 감탄한다. 또한 그가 만든 ‘쿠릴타이’라는 지도자 선출시스템은 근대국가의 절차적 민주주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약 8백 년 세계의 정복자 칭기즈칸과 진인 구처기 조사, 두 지도자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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