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천주교 신앙은 이 땅이 어둡고 춥고 헐벗고 배고팠을 때 겨레의 마음속에 싹 틔우고 꽃 피웠다. “때리면 맞아야 하고, 부수면 치워야 하고, 가져가면 그저 빼앗길 뿐”인 그래서 “울음이 강을 이루고 절규가 천둥 번개가 되고 때 이른 주검들이 산처럼 쌓여 갈 때” 천주교인들은 새 세상을 꿈꾸며 소리 없이 길을 냈다. 그래서 허리에 무수히 도끼날이 찍혔지만 꺾이지 않고 끝내 우람한 나무가 되었다.
3. 지금은 어떤 세상이기에 그 옛날 짓밟고 빼앗던 무지몽매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탐욕과 혐오, 적대와 환멸의 도가니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사방 둘러봐도 희망은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누구 하나 바라볼 사람마저 없으니 쉽사리 불안과 무력감의 포로가 되고 만다. 현실을 잊으려 덧없는 위락에 빠져 보지만 해결책이 될 리 만무다. 고난 중에 믿음의 밭을 일구신 옛사람들은 오늘의 교회에 무슨 말씀을 해주시려나.
절제를 모르는 강자들의 광기와 이리저리 헤매고 떠도는 세태를 생각하면 우리의 신앙이 너무나 가벼워졌음을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이 “우리 시대는 믿음이 없어서 촐랑댄다”고 한 적이 있다. 함부로 강산을 파헤치고, 바다를 더럽히는 짓이나 사회적 참사가 일상이 된 것도 “세상에는 나를 초월한 어떤 분이 계시며, 자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이 없어졌기 때문”이라면서 분별없이 촐랑거리는 인심을 안타까워했다.
4. 빈대 한 마리가 초가삼간, 아니 대를 이어 오랜 세월 공들여 이룩한 말쑥한 보금자리를 다 태우고 있다. 나라를 망치고 있는 장본인은 “탄핵?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 할 정도로 오만방자하다. 세상이 원래 이렇고 인간은 이런 거라고 떠들어대는 그의 앙다문 입술에서 악의 신비가 드리워진 어둠을 본다.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사람의 사람다운, 가장 이성적이고 복음적인 반응은 어떤 것일까? 아침마다 이 땅에 천주의 뜻을 펼쳐 천주의 이름을 빛내며 기어코 천주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우리의 사랑과 혁명은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가?
5. 날 때부터 알기도 하고[生而知之] 배워서 알기도 한다지만[學而知之] 사람은 곤란과 시련을 겪으며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는다[困而知之]. 민주주의라는 느티나무를 키우는 일은 더 더욱 그렇다. 만일 오늘의 시행착오를 덧없고 뜻 없는 것으로 돌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불행이 될 것이다. 오늘을 한 인간으로서 저마다 강해지고 맑아지는 단련, 정화의 때로 삼자. 53년 전 오늘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외침과 함께 암흑 속 횃불이 되어주신 전태일 열사의 소신공양을 기억하며 서로에게 빛이 되고 힘이 되고 길이 되어 주자.
6. 천지분간 못하는 ‘하나’를 몰아낸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쉽게 살려 하고 편히 가지려 하고, 각박하게 자기 앞만 바라보는 뿌리 깊은 이기적 관성을 끊지 못하는 한 코로나 이후 더 악독한 코로나를 마주하는 불행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 인간의 삶을 갈아먹는 야수 자본주의의 노비로 만족할 것인가. 공생공락의 경세제민, ‘고루살이’가 아니면 내일은 없다. 인간을 위하는 혁명, 사람을 위하는 사랑을 결단해야 이 겨울을 견디고 새 봄을 맞을 수 있다.
2023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를 기억하며 의정부 주교좌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천주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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